로버트 치알디니의 설득의 심리학
PART 3 일관성의 원칙
일관성의 열쇠는 입장 적립
한국전쟁 당시 수많은 미군 포로들이 중국 공산당의 포로수용소에 수 감됐다. 전쟁 초기부터 중국은 가혹한 형벌로 포로를 복종시키는 북한 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포로를 다뤘다고 알려졌다. 중공군은 특히 무자비한 태도를 피하고 이른바 '관용정책'이라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이 는 사실상 포로 전체를 대상으로 한 정교한 심리 공격이었다. 종전 이후 미국 심리학자들은 송환 포로들을 대상으로 강도 높은 조사를 실시해 이 심리 공격의 실태를 파악했다. 중국 공산당의 프로그램 중 일부가 상 당한 성공을 거둔 것에 불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중공군은 미군 포로들에게 다른 포로들에 대한 정보를 효과적으로 캐내곤 했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이로써 미군 포로의 탈출 계획은 금방 발각됐고 탈출 자체가 거의 불가능해 졌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포로에 대한 중국의 세뇌 프로그램 조사 단장이었던 미국 심리학자 에드거 샤인 Edgar Schein, 1956은 다음과 같이 적 었다. "탈출 사건이 발생하면 중공군은 밀고자에게 쌀 한 봉지를 주는 방 법으로 탈출한 포로를 다시 잡아들였다." 실제로 중공군의 포로수용소 에 수감된 거의 모든 미군 포로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중공군에 협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포로수용소 프로그램에 대한 연구 결과를 살펴보면, 중공군은 주로 입장 정립 및 그에 따른 일관성 유지 압력을 이용해 포로들의 복종을 유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중공군의 첫 번째 문제는 미군 포로들에게 최소한의 협력이라도 얻어낼 방법을 찾는 일이었다.
미군 포로 들은 오직 관등 성명과 군번만 밝히도록 훈련받은 군인들이었다. 신체적 가혹행위 없이 어떻게 그런 미군들에게 군사기밀을 폭로하고, 동료들을 밀고하고, 공개적으로 조국을 비난하도록 했을까? 중국의 해결책은 간 단했다. 낮은 단계부터 차근차근 올라간 것이다.
예를 들어 중공군은 포로들에게 전혀 심각해 보이지 않는 반미적 또 는 친공산주의적 발언(미국은 완벽하지 않다, '공산국가에는 실업 문제가 없 다' 등)을 하도록 요구했다. 포로들이 이런 작은 요구를 수용하면, 그와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좀 더 실질적인 요구가 이어졌다. 우선 미군 포로 에게서 미국이 완벽하지 않다는 동의를 얻어내면, 어떤 면이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하는지 구체적으로 지적해보라고 요구하는 식이었다. 그래 서 미군 포로가 몇 가지 구체적인 사례를 이야기하면, 그런 미국의 문제 점'을 목록으로 작성해 서명하라는 요구가 이어졌고 다른 포로들과의 토 론 시간에 자신이 작성한 목록을 직접 읽도록 했다. 목록을 읽으면 "결국 당신은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는 거지?"라는 식의 질문을 했고, 나중에는 작성한 목록을 더 확대하고 미국의 문제들을 더 자세히 논의하라고 요 구했다.
그러고 나면 중공군은 해당 포로수용소뿐만 아니라 북한의 포로수용 소 및 남한의 미군들에게까지 송출하는 반미 성향의 라디오 방송에서 그 포로의 실명을 밝히면서 그가 작성한 문서를 공개했다. 그 미군 포로 는 순식간에 적군을 돕는 '협력자로 전락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미군 포로가 강력한 위협이나 강제에 따라 글을 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만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자신의 자아 이미지가 자신의 행동 및 협력자라는 새로운 꼬리표에 맞도록 변했을 뿐이다.
샤인은 연구를 통해 "전 체적으로 협력을 거부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한 반면, 대다수가 한두 번 에 걸쳐 자신에겐 사소해 보이지만 중국으로서는 얼마든지 유리하게 활 용할 수 있는 행위들로 중국에 협력행위를 했다. •••••이런 방법은 취조 중에 자백과 자아비판, 정보 등을 끌어내는 데 특히 효과적이었다."라고 밝혔다.
설득에 관심이 많은 단체들도 이 같은 접근 방식의 유용성과 위력을 알고 있다. 자선단체들은 사람들에게 큰 호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점진 적으로 입장 정립의 수준을 높이는 방법을 사용한다. 연구 결과에 따 르면, 상담 허락 같은 사소한 참여가 나중에 엄청난 액수의 기부로 이 어지는 '중요한 설득'의 시작 단계가 될 수 있다 carduce, Deuser, Bauer, Large & Ramaekers, 1989; Schwartz, 1970.
영업조직에서도 이 같은 방법을 자주 사용한다. 영업사원들은 작은 제품에서 시작해 점점 큰 제품으로 판매를 확대한다. 첫 거래의 목표는 이익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고객을 거래에 끌어들이는 것이므로 아무리 값싼 제품이라도 상관이 없다. 그런 방식으로 고객을 첫 거래에 끌어들 이고 나면 자연스럽게 더 큰 규모의 거래로 발전해간다. 영업 관련 잡지
「아메리칸 세일즈맨 Ametean salemun」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설 명해놓았다.
이 전략의 핵심은 작은 주문에서 시작해 상품 전체로 판매 범위를 확대해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라. 혹시 상대방이 전화 상담에 들 인 시간과 노력에 전혀 못 미치는 작은 주문을 한다 해도 일단 주문한 이상 그는 이제 잠재 고객이 아니다. 진짜 고객이 된 것이다 cre. 006.2.21
작은 요구에서 시작해 결국 그와 관련한 더 큰 승낙을 얻어내는 전략 을 한 발 들이밀기 ookinthedoo: 전략이라고 한다. 사회과학자들이 이 전 략의 효과를 처음 실감한 것은 1966년 심리학자 조너선 프리드먼, nahin Frcednan 과 스코트 프레이저Scolt Fract가 발표한 놀라운 연구를 통해서였 다. 자원봉사자로 가장한 연구진이 캘리포니아의 주택가를 집집마다 방문해 집주인들에게 터무니없는 부탁을 해봤다. 각 가정 앞마당 잔디 밭에 공익 간판을 세우도록 허락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공익 간판 설치 사례로 제시한 사진에서는 볼품없는 글씨체로 '안전운전 하세요!'라고 쓴 커다란 입간판이 아름다운 주택의 전망을 완전히 망쳐놓고 있었다.
당연히 지역 주민 대다수가 거절할 만한(승낙한 사람은 전체 중 17퍼센트였 다) 불쾌한 요청이었는데도 이상하게 단 한 집단에서만 매우 긍정적인 반응이 나타났다. 무려 76퍼센트의 주민들이 앞마당 사용을 허락했던 것이다.
이런 놀라운 승낙 비율은 2주 전 해당 주민들에게 벌어졌던 일과 관련 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안전운전과 관련해 이미 소소한 참여를 했던 것 이다. 2주 전 또 다른 '자원봉사자가 각 가정을 방문해 안전운전'이라고 쓰인 가로세로 3인치짜리 작은 간판을 설치해달라고 부탁했다. 주민 대 부분이 허락할 만큼 소소한 요청이었지만 그 효과는 엄청났다. 주민들 은 순진하게도 2주 전 안전운전과 관련한 소소한 부탁을 승낙했기에 그 보다 훨씬 규모가 큰 부탁도 기꺼이 승낙했던 것이다.
프리드먼과 프레이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또 다른 집단의 집주인들을 대상으로 앞서 진행한 실험 내용을 약간 변형해 실험했다. 연구진은 먼저 주민들에게 캘리포니아를 아름답게 지킵시다'리는 내용의 청원서 에 서명해달라고 부탁했다. '우리 주를 아름답게 유지하자'는 주장은 정 부를 효율적으로 운영하자나 '태교를 잘하자'와 같은 주장처럼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는 주제이기에 당연히 거의 모든 집주인이 서명했다. 그로부터 2주 후 프리드먼과 프레이저는 똑같은 가정에 새로운 '자원봉사 자를 파견해 흉물스러운 안전운전 하세요!' 입간판을 앞마당에 세우게 해달라고 부탁하게 했다. 어떤 면에서는 이번 집주인들의 반응이 이 연 구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이었다. 무려 절반이나 되는 집주인들이 '안전 운전 하세요! 입간판 설치에 동의한 것이다. 그들이 2주 전에 했던 입장 정립의 주제는 안전운전이 아니라 '캘리포니아를 아름답게 지킵시다'라 는 전혀 다른 공익적 주제였는데도 말이다.
처음에 프리드먼과 프레이저는 이 연구 결과에 당황했다. '캘리포니아 를 아름답게 지킵시다'라는 내용의 청원서에 서명한 행동이 왜 전혀 다 른 내용에 훨씬 더 큰 부탁을 기꺼이 수락하는 원인이 됐을까? 여러 가 지 해석을 검토한 결과 마침내 수수께끼의 실마리가 풀렸다. 청원서에 서명한 행위 자체로 주민들의 자아 이미지가 바뀌었던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시민의식을 발휘해 공공의 일에 적극 참여하는 모범 시민으로 인식했다. 그런데 2주 후 '안전운전하세요! 간판을 세우는 또 다른 공익 을 위한 일에 참여해달라고 요청받자 새로 형성된 자신의 자아 이미지 와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프리드먼과 프레이저는 이 현상을 이렇게 설명했다.
어떤 일에 참여하거나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에 대한 주민들의 느낌이 달라진 것이다. 일단 하나의 요청을 수락한 뒤 주민들의 태도가 변했다.
그들은 자신을 이런 종류의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 낯선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는 사람, 자신이 믿는 일을 실천하는 사람, 대의를 위해 협력할 줄 아는 사람으로 여겼다,. 201.
프리드먼과 프레이저의 발견에서 보여주려는 것은 아무리 사소한 요 청도 함부로 승낙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승낙이 우리의 자아 개념에 영 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Burger & Caldwell, 2003. 처음의 승낙은 그와 유 사하지만 훨씬 규모가 큰 요구는 물론이고, 실제로 그와 거의 관련이 없 는 수많은 다양한 요구에도 승낙할 확률을 높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 소한 입장 정립 속에 숨어 있는 이런 식의 2차적이고 일반적인 영향력은 대단히 무서운 점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두려워 다음부터는 아무리 내가 지지하는 대 의와 관련 있는 청원서라도 서명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런 행동은 내 미래의 행동뿐 아니라 내 자아 이미지에도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 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더욱이 한 사람의 자아 이미지가 변하면 그 새로운 자아 이미지를 이용하려는 사람은 거기서 온갖 종류의 이익 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리드먼과 프레이저의 연구에 참여한 집주인들 가운데 과연 누가 깰 리포니아 주를 아름답게 지킵시다'라는 청원서를 들고 찾아와 서명을 요 청했던 자원봉사자'들이 사실은 2주 후 안전운전 입간판 설치를 요청한 사람들이었다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또 과연 누가 자신이 안전운전 입간판을 세우기로 한 결정이 2주 전 청원서에 서명했던 일의 결과라고 짐 작이나 했겠는가? 아마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흉물스러 운 입간판을 세워놓고 갑자기 후회가 밀려온다면 '자기 자신'과 자신의 그 빌어먹을 시민의식 외에 무엇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캘리포 니아 주를 아름답게 지킵시다'라는 청원서를 들고 온 자원봉사자나 그들 의 사회적 주짓수 기술은 전혀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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