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치알디니의 설득의 심리학
PART 3 일관성의 원칙
- 대중의 눈
문서 작성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 효과적인 이유 중 하나는 문서는 공 개하기 쉽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 포로들이 겪은 일을 생각하 면 중공군은 중요한 심리 원칙 하나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듯하다. 공개적 입장 표명이야말로 가장 오래도록 효과를 발휘한다는 점 말이다. 중 공군은 미군 포로들의 친공산주의적 작문을 다른 포로들에게 끊임없이 공개했다. 수용소 주변에 게시하기도 했고, 토론회 등에서 작성자에게 직접 낭독하라고도 했으며, 심지어 수용소 라디오 방송에서 읽어주기도 했다. 중국 입장에서는 더 많이 공개할수록 더 유리했다. 왜 그랬을까?
다른 사람 앞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면, 일관성 있는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그 입장을 고수하려는 욕망이 생긴다 Tedeschi, Schlenker & Bonom, 19715 Schlenker et al, 1994. 일관성 있는 것이 사회에서 얼마나 바람직한 특징인지 앞서 설명한 바 있다. 일관성 없는 사람은 변덕스럽고, 불확실하고, 귀가 얇고, 경솔한 사람으로 매도되는 반면 일관성 있는 사람은 이성적이고, 확실하고, 신뢰할 만하고, 건전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므로 누구 나 자신이 일관성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행위를 꺼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자신의 입장을 공개할수록 체면상 그 입장을 더욱 고수하려 들 것이다.
공개적 입장 표명이 앞으로의 일관성 있는 행동으로 연결되는 사례는 두 명의 저명한 사회심리학자 모튼 도이치 Morion Deulsch 와 헤럴드 제라드 Herald Gerard가 시행한 실험에서 찾아볼 수 있다1955. 연구진은 먼저 대학 생들에게 여러 개의 선을 보여주고 마음속으로 길이를 짐작하게 했다.
이때 첫 번째 집단의 학생들에게는 짐작한 수치를 종이에 적고 서명해 실험자에게 제출하는 것으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공개하도록 했다.
두 번째 집단의 학생들에게는 짐작한 수치를 금방 썼다가 지울 수 있는 매직 패드magite pad 에 몰래 적었다가 누가 보기 전에 얼른 지움으로써 자 신의 입장을 자신한테만 분명히 하도록 했다. 세 번째 집단의 학생들에 게는 아예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할 필요 없이 집착한 수치를 머릿속으
로만 기억하도록 했다.
도이치와 제라드는 이런 식으로 일부 학생에게는 공개적으로 또 다른 일부 학생에게는 개인적으로 입장을 표명하게 하고, 나머지 학생들에게 는 입장 표명이 필요 없는 상황을 마련했다. 도이치와 제라드의 목적은 세 집단의 학생들 가운데 기존 판단이 틀렸음을 보여주는 새로운 정보를 제공했을 때 자신의 첫 판단을 가장 강하게 고수하는 집단이 어느 쪽인 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모든 학생에게 첫 판단이 잘못됐음을 시사하는 새로운 증거를 제공한 후 판단을 번복할 기회를 부여했다.
실험 결과는 매우 분명했다. 기존 선택을 가장 쉽게 포기한 집단은 자 신의 판단 내용을 적지 않은 집단이었다. 이들은 머릿속에 담고 있던 자 신의 첫 판단에 의문을 제기하는 새로운 증거를 제시하자 금방 새로운 정보의 영향을 받아 자신이 앞서 '옳다'고 생각했던 결정을 쉽게 번복했 다.
입장 정립을 하지 않았던 이 집단에 비해 자신의 판단을 매직 패드 에 잠깐 동안 기록했다가 지운 집단은 판단을 번복할 기회를 줘도 의견 을 바꾸는 데 다소 머뭇거렸다. 비록 자신한테만 했던 입장 정립이었지 만, 일단 첫 판단을 글로 적었으므로 기존 결정과 모순되는 새로운 증거 의 영향을 거부하고 기존 결정을 고수하려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의 견 번복을 가장 강하게 거부한 집단은 바로 자신의 첫 판단을 공개적으 로 보고한 집단이었다.
이 집단을 가장 완고한 집단으로 이끈 것은 바로 공개적인 입장 표명이었다.
일관성보다는 정확성이 생명인 상황에서도 이런 완고함이 나타날 수 있다. 6~12명의 모의 배심원에게 판단이 까다로운 사건의 평결을 맡긴 어느 실험에서 배심원들이 비밀투표가 아니라 손을 들어 공개적으로 의 견을 표시해야 하는 경우에 '평결불능(hung jury, 배심원의 의견이 엇갈려 평 결을 내리지 못하는 것 - 옮긴이)' 판정이 더 자주 나타났다.
배심원들이 일 단 공개적으로 첫 번째 의견을 밝히고 나면 다시 공개적으로 번복하기 가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배심원장이 공개투표보 다는 비밀투표를 선택하면 평결불능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 Ker & MacCoun,1985.
자신이 공개적으로 밝힌 의견을 가장 완강히 고수한다는 도이치와 제라드의 발견을 유용하게 이용할 수도 있다. 나쁜 습관을 버릴 수 있도 록 도와주는 단체 등을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비만 클리닉에서는 사람 들이 체중 감량 결심을 한 경우 군침 도는 제과점 진열장이나 코끝을 간 질이는 음식 냄새, 늦은 밤 야식 광고 등에 아주 쉽게 넘어간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다. 따라서 반드시 공개 선언이라는 튼튼한 기둥을 세워 준다. 체중 감량 목표를 종이에 적어 친구, 친척, 이웃 등 되도록 주변 사 람들에게 많이 '보여주라고' 유도한다. 모든 방법에서 실패한 사람도 이 간단한 방법으로 효과를 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물론 공개 선언을 하려고 특수 클리닉에 돈을 지불할 필요는 없다. 샌 디에이고의 한 여성은 이런 식의 공개 선언을 활용해 마침내 금연에 성 공한 방법을 적어 보냈다.
흡연이 암을 유발한다는 연구 결과를 들은 후라고 기억합니다. 그런 비 슷한 경고를 들을 때마다 금연을 결심하곤 했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만은 뭔가 조치를 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라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입니다. 그래서 생각했죠. '강한 자존심을 이용해서 이 빌어먹을 습관을 고쳐보면 어떨까? 저는 좋게 평가받고 싶은 사람들의 목록을 작 성했습니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새기지 않은 깨끗한 명함지를 사다가 뒷면마다 다시는 담배를 피우지 않기로 약속합니다라고 적었습니다.
그후로 일주일 동안 약속을 적은 명함에 서명을 해서 목록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직접 전달하거나 우편으로 발송했습니다. 아버지, 동부에 사 는 남동생, 직장 상사, 제일 친한 여자친구, 전 남편 등 모두에게 명함을 전했지만 딱 한 사람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만은 제외했습니다. 남자친 구에게 너무 푹 빠져 있던 때라 그 사람만큼은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으 니까요. 남자친구한테도 명함을 줄까 하고 두 번이나 망설였지만 그 사 람한테까지 약속을 못 지키면 정말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사무실에서 (우리는 같은 회사에 근무합니다) 남자친구한테 뚜벅 뚜벅 걸어가 명함을 건네고는 아무 말 없이 돌아와버렸습니다.
단번에 담배를 끊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1,000번도 넘게 다시 담배를 피워 물까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마다 이렇게 무 너지면 내 목록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나약한 인간으로 판단할 지를 상상했습니다. 정말 효과가 있더군요. 그 이후로 담배를 완전히 끊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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